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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 영국 · 독일의 오페라

프랑스 영국 독일의 오페라

이탈리아의 오페라는 유럽 여러나라에 퍼졌으며, 함부르크를 제외한 여러나라의 오페라는 18세기 후반에 이르기까지 귀족적인 예술이 지배적이었다.  이처럼 이탈리아의 오페라가 광범위하게도 사회적으로 자발적인 성원을 얻어 발전한데 비해, 다른 나라에서는 궁정의 경제력을 배경으로 강력한 지지를 볼 수 있었다.  그것은 국민적인 오페라를 이룩하는데 긴요한 일이었다.  즉 이탈리아의 오페라는 자연히 발전 육성되었지만, 다른 나라에서는 그것이 하나의 이국적인 예술로 발전하던가 그 반면에 새 환경에서 지탱하기에 필요한 여러 특성을 구비해야만 했다.

 1. 프랑스의 오페라

 프랑스는 17세기 전반에 걸쳐 이탈리아와 정치·문화에 있어서 긴밀한 관계를 가지고 있었다.(이 시기는 앙리 4세·루이 13세·루이 14세가 어렸을 때이다.) 그러므로 1647년에 처음으로 프랑스에서 오페라가 상연된 것은 오히려 늦은 감이 있다.  그러나 이탈리아의 오페라를 받아들인 나라 중에서는 가장 성공한 셈이다.
 프랑스는 발레라는 세계 최고의 무대예술을 가지고 있었으며, 오페라를 받아들인 이래 그들은 오페라와의 경쟁에 강압되지 않고 18세기 유럽에 있어서 오직 하나의 국민적인 전통을 가지게 되었다.
 프랑스 오페라를 프랑스적으로 만든 사람은 륄리(Lully, J. B. 1633∼1687)였다.  그는 본래 이탈리아의 피렌체 출생으로 만 14세 때에 파리에 와서 귀화했으며, 루이 14세의 총애를 받아 궁정 악장·작곡가가 되었다(그는 뛰어난 통찰력으로 그때까지의 프랑스에서 확실한 지위를 구축한 모든 전비극·목가극·이탈리아의 오페라 그리고 프랑스의 발레가 있었다).
 그리하여 그는 50여편의 오페라를 썼는데 거기에는 무용이 중요시되었으며, 레시타티브에는 프랑스어의 억양을 살려 서곡에 새로운 수법을 썼다.  그것은 처음임<느림-빠름-느림> 이른바 프랑스풍의 서곡을 창안하였다. 또한 그는 생을 통해 프랑스 오페라의 지배권을 한 몸에 지닐 수 있었으며, 향후 1세기에 걸쳐 성행한 프랑스 국민 오페라의 기초를 닦았다.  그 이후의 대표적인 인물에는 라모(Rameau, J. P. 1683∼1764)를 손꼽을 수 있는데 그는 오페라뿐만 아니라 이론에도 대가였다.

2. 영국의 오페라

 프랑스에서는 발레에서 오페라가 흥한 것처럼, 영국에서는 마스크(Masque)에서 바탕이 되어 오페라가 생겼다.  17세기 중엽 프랑스와 같이 국민적인 오페라를 가지게 된 영국은 이보다 앞서 16세기 말부터 음악과 시·성악·기악·댄스·연기 등을 결합시킨 형태로서 왕후와 귀족을 위한 가면극(Masque)이 성행하여 1635년경부터는 무대에 상연되어 크게 유행되었다.
 한편 17세기 전반 영국에서는 청교도(Puritan)가 우세하여 오페라는 배척을 당했으며, 1655년 찰스 2세가 왕정을 복구한 이래 프랑스·이탈리아 음악 문화를 수입하게 되었다.  그런데 영국의 오페라는 1700년이 지나자 이탈리아에 압도되었다.  그리고 17세기 후반에는 단음악을 사용한 오페라가 나타났는데 그것을 완성시킨 사람은 영국 음악사상 최대의 음악가이며, 오페라의 대표자격인 퍼셀(Purcell, H. 1659∼1695)이었다.  영국의 극음악은 그에 의해 지금까지도 볼 수 없던 금자탑을 이루었다.
  1689년에 발표한 오페라 『디도와 에네아스(Dido and Aeneas)』는 극과 음악에 있어서 호평을 받은 수수한 오페라로서는 유일한 작품이다. 퍼셀의 작품은 멜로디에 있어서 륄리보다 더 아름다우며, 영국의 특성을 풍부하게 발휘하였다. 그리하여 세미 오페라 등 40여 곡의 부수음악을 작곡하였다. 그러나 그는 애석사게도 36세로 요절하고 말았다. 그의 죽음은 영국 극음악 장래에 모든 희망을 끊어 버리  오페라의 운명이었으며, 그것은 여름을 맞이할 수 없는 봄이기도 했다.
  이탈리아의 극장은 서정 오페라를 즐겨하였고, 프랑스가 「오페라 발레」를 좋아한데 비해 당시 영국의 국민성은 음악을 수반한 극의 형식을 종아 하였다. 그리하여 런던에서는 이탈리아의 많은 작곡가들이 활약하였다. 그러나 헨델이 영국으로 귀화하여 그 글을 위해 오페라를 쓰기 까기는 주목할만한 오페라가 별로 없었다. 한편 영국의 작곡가들도 이탈리아 오페라에 열중하는 사조에 아무런 저항이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이탈리아의 오페라는 18세기에 이르러 파리를 제외한 모든 나라에서 아주 절대적이었다.

3. 초기 독일의 오페라

  초기 독일 오페라의 시작은 프랑스나 영국보다도 먼저 1618년 잘쯔부르크에서 이탈리아의 오페라를 상연하였다. 뒤이어 비인 에서는 1626년, 프라그에서는 1627년에 상연했는데 그것은 모두 이탈리아의 지배아래 있었다.
  독일은 원래 순음악에 힘썼으므로 극음악에 있어서는 프랑스에 뒤떨어져 있었다. 15·16세기경부터는 「노래의 연극」이라는 징시필(Singspiel)이 나타났는데 이것은 보통 대화사이에 간단한 노래를 삽입한 희극적 내용을 가진 걱이었다. 그러므로 독일의 음악가 중에는 징시필과 같은 오페라를 많이 쓴 것을 볼 수 있다.


  독일 오페라 초기의 역사는 프랑스나 영국과 같이 일관된 통일성이 있는 발전의 역사가 아니다. 왜냐하면 17세기 독일의 정치적인 분열과, 문화적으로는 전통극과 음악의 배경에 서로 모순되는 요소와 또는 이탈리아의 영향 등의 여건들은 음악사상 어려운 분제들을 내포하고 있었다 (17세기의 독일은 한 통일국가가 아니라 대개 1700개의 독립성을 지닌 여러나라로서 정치적으로 통합되지 않은 연방이었다. 그 대부분은 작은 기사영인데 그밖에 예컨데 함부르크·브레멘·프랑크푸르트·뉘른베르크·아우구스부르크·슈트라스부르크 등 51개의 자유시와 63개의 교회영이 있었다. 전체적으로 규모가 작고 정치적인 중요성이 빈약한 약 200의 왕국과 후작·백작의 영토이었다)
  오페라에 있어서 이탈리아와 프랑스의 절충적인 견해를 가진 외국의 지휘자와 작곡가·가수들이 독일 궁정에서 날뛰었고, 이탈리아어·프랑스어·독일어로 번역하여 노래하였다. 그 가운데 작곡가로는 이탈리아 사람이든가 이탈리아풍의 작고을 흉내내는 독일인이 있을 따름이었다. 그것은 독일이 정치적으로 뒷받침이 없는 나약한 연방이었기 때문이다. 신성 로마제국에 대한 명목적인 충성관계에 기인한 외관상의 통일과 1619∼1648년 사이에 일어난 30년 전쟁이후의 독일은 경제적인 궁핍에 허덕였으며 국민적인 전통에 모든 자부심을 상실하였다. 이에 따라 외국 문화의 여러 요소가 들어왔으며, 궁정에서 열리는 오페라는 이탈리아의 작품으로서 여러 지방에서 성행하였다.
  독일 오페라의 작곡가로는 쉬쯔(Schutz, H. 1585∼1672)가 있었고, 함부르크와 같은 곳은 자유스런 주권에서 국민적인 악파가 생겨, 1678년부터 60년 동안 베네치아를 제외한 유럽에서 처음으로 열린 대중을 위한 오페라 극장으로 발전하였다. 이때 최대의 작곡가로는 카이저(Keiser, K. 1674∼1739)이었다.


  1738년 경에는 함부르크마저 독일의 작품을 상연하지 못하고 극장은 페쇄되었다. 그후 약 50년간 독일의 오페라는 자취를 감추고 영국과 같이 18세기 이탈리아 악파에 굴복당하고 말았다.
  쉬쯔이후 작곡가로는 하세(Hasse, A. 1699∼1783)·프랑크(Frank, W. 1641∼1695)·마테존(Matheson, J. 1685∼1764)과, 젊은 헨델(Handel G.F. 1685∼1759) 등이 있었다. 헨델은 18세기에 들어가 점차 현대화 되어가고 생기를 잃어가려는 오페라에 대해 근본적으로 개혁할 정도의 기능은 없었다 할지는 모르나 유럽의 오페라를 모아 하나로 크게 완성시켰다. 그는 당시 나폴리 악파의 스타일을 받아 들었으나 이탈리아의 유행에는 물들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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