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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chaikovsky, Peter Ilyich (차이코프스키)

출생국가

  러시아

활동년도

  1840-1893

활동년도

  3,655 곡

활동년도

  1,004

        
 

러시아가 낳은 음악가는 많지만 그중 가장 국제적으로 명성을 떨친 사람을 꼽는다면 차이코프스키일 것이다. 만약 러시아 음악에서 그를 빼버린다면, 음악의 다른 장르는 모르겠지만 아마 교향곡 분야에서는 사막같은 나라가 되었을 것이다. 특히 <비창 교향곡>은 러시아 뿐만 아니라 전세계 교향곡의 보고 가운데서도 열손가락안에 드는 명곡중의 명곡이다.
차이코프스키는 1840년 5월 7일 우랄 지방의 보트킨스크라는 도시에서 태어났다. 그곳은 당시는 비야토카 현에 속했고 지금은 우도몰트 자치 공화국에 포함되어 있다. 금속공업이 크게 번성한 이 도시에 광산 감독관이었던 그의 부친이 부임한 것은 1837년이었다. 차이코프스키의 모친은 교양과 품의를 갖춘 아름다운 목소리의 소유자였다. 차이코프스키는 이들 부부의 둘째 아들도 태어나 네 살 때부터 피아노를 시작하여 여섯 살 때는 제법 잘 쳤다.
1848년 부친의 직업상 그의 가족은 보트킨스크를 떠나 모스크바로, 그 후에는 다시 페테르부르크로 옮겨가야 했다. 차이코프스키는 그곳에서 기술학교에 들어가 정규교육을 받는 한편 처음으로 정식 피아노레슨을 받게 되었다. 1854년에는 다시 우랄지방의 아라파에스크로 이주했는데, 이 때문에 그의 음악교육도 잠시 중단되었다. 그 무렵 양친은 그에게 음악가가 될 재능이 있으리라고는 생각지 않았고, 또 당시의 러시아 사정으로는 음악가를 지망한다는 것은 큰 모험이었다. 우선 경제적으로 안정을 바랄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 이듬해 그는 가족과 헤어져 형과 함께 페테르부르크로 가서 그곳 법률학교 예과에 입학했다. 그러나 차이코프스키는 법률 공부 외에 음악공부도 열심히 하였다. 그 무렵(1854)에 작곡한 곡으로는 <피아노를 위한 왈츠>가 남아있다. 그리고 1855년부터는 독일인 두돌프 퀸딩거에게서 피아노와 음악이론을 배웠다.
1859년 법률학교를 졸업한 그는 1등 서기관으로 법무성에서 근무하게 되지만 소송 업무에 휘말리는 나날이 계속되었다. 음악에 대한 집념을 버리지 못한 그는 직장업무와 음악 사이에서 우울한 나날을 보냈다. 그러던 중 전기가 왔다. 1860년 안톤 루빈슈타인에 의해 음악교실이 창설 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차이코프스키의 부친도 그에게 그 음악교실에 다니도록 허락했기 때문에 이듬해부터 그는 니콜라이 자렌바에게서 음악이론을 배울 수 있었다. 이 교실은 그 후 1862년 페테르부르크 음악원으로 승격하여 러시아 최초의 음악원이 되었다. 그 뒤에도 차이코프스키는 그 곳 학생으로 머물면서 작곡가가 되기 위한 수업에 열중했다. 그 이듬해에는 법무성에 사표를 제출하였으나 실제로는 4년후인 1867년까지 해직되지 않았다.
음악원에서 차이코프스키는 자렌바에게도 배웠으나 안톤 류빈슈타인에게 직접 사사하여 유럽음악의 정통 수법을 완전히 익힐 수 있었다. 음악원 재학중의 작품으로는 주로 관현악이나 실내악의 습작 소품이 있다.
1865년 페테르부르크 음악원을 졸업한 그는 안톤 루빈슈타인의 동생이며 역시 뛰어난 피아니스트이자 이론가로 널리 알려진 니콜라이 루빈슈타인이 그 전 해에 개설한 모스크바 음악교실에 화성학 교수로 초빙되었다. 당시 모스크바는 페테르부르크에 비하면 시골이었다. 차이코프스키는 페테르부르크에 미련을 둔 채 이듬해에 그 곳으로 부임을 했다. 그가 부임한 얼마 후에 음악교실은 음악원으로 승격했고, 페테르부르크 음악원과 더불어 러시아 음악교육의 양대 전당으로 발전해 갔다. 그리하여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러시아 음악가들은 크게 이 두 곳에서 배출되었던 것이다. 차이코프스키는 이 음악원에서 십 수년간 교편을 잡았는데 그간 니콜라이 루빈슈타인으로부터 각별한 대우를 받았다. 당시 동료들로는 이론과 음악사를 담당했고, 차이코프스키가 죽은 후에 그의 전기를 쓴 것으로 유명한 니콜라이 카시킨과 첼리스트 알브레히트 등이 있다.
모스크바로 온 후 차이코프스키가 발표한 최초의 중요한 작품은 <겨울날의 환상>이란 제목의 <교향곡 1번>(1866)이다. 러시아 민요를 토대로 한, 국민적 색채가 강렬한 이 곡은 페테르부르크에서 초연되었다. 그것이 계기가 되어 그는 1868년 발라키레프를 중심으로 한 이른 바 국민주의 '5인조'와 교제를 맺기 시작했다. 그리고 발라키레프의 권유로 리스트의 교향시 스타일의 서곡 <로미오와 줄리엣>(1870)을 작곡했다. 그러나 그 후 그의 작품은 국민악파 멤버들의 작곡 경향과는 점차 멀어지면서 서구파로서의 차이코프스키, 즉 모스크바 악파의 확립이 이루어져 러시아 2대 조류의 한쪽 기수가 되기에 이르렀다.
이 무렵부터 그의 작곡 활동은 아주 왕성해져서 그의 초기 걸작들이 잇따라 탄생하였다. <안단테 칸타빌레>로 유명헌 <현악 4중주곡 제1번>(1871)과 국민주의 수법에 의한 <교향곡 제2번>(1872), 세익스피어의 희곡에 의한 교향적 환상곡 <템페스트>(1873), 고골라의 원작에 바탕을 둔 <대장장이 바큘라>(1874)등이 그것이다.
1874년부터 이듬해에 걸쳐 웅대한 구상의 <피아노 협주곡 제1번>이 작곡되었다. 이 곡은 러시아인에 의해 씌어진 피아노 협주곡으로서는 획기적인 작품이며, 이미 서곡 <로미오와 줄리엣>으로 차이코프스키를 높이 평가하고 있던 독일의 대지휘자인 한스 폰 뷜로에 의해 완성된 해에 보스턴에서 초연되었다.
1875년에는 <교향곡 제3번>이 작곡되었고, 볼쇼이 극장의 청탁으로 발레곡 <백조의 호수>가 그 이듬해에 완성되었다. 이 곡을 작곡하는 데는 프랑스의 발레곡 아당의 <지젤>과 들리브의 <코펠리아>를 참고하였다. 그리하여 근대 발레를 확립한 인물로서 차이코프스키는 이들 두 작곡가와 더불어 길이 그 지위를 인정받고 있다. <백조의 호수> 작곡을 전후하여 그는 1875년 말에서 이듬해에 걸쳐 베를린을 경유해 파리로 여행했다. 파리에서 그는 비제의 <카르멘>을 보았는데, 이 오페라에서 받은 강렬한 감동은 차이코프스키의 대표적 오페라 <예브게니 오네긴>(1877-1878)로 결실을 맺게 된다. 그밖에 이 부렵의 작품으로는 피아노곡집 <사계>(1875-1876), <슬라브 행진곡>, 환상적 서곡 <프란체스카 다 리비니>, 첼로와 관현악을 위한 <로코코 주제에 위한 변주곡>(이상 1876)등이 유명하다.
1876년 말부터 차이코프스키의 작곡활동에 있어 중요한 의미를 갖는 폰 메크 부인과의 특별한 관계가 시작되었다. 철도 경영자의 미망인인 폰 메크 부인은 전부터 차이코프스키의 음악에 깊은 경의를 보여 왔는데, 그것이 그의 음악에 대한 경제적 원조로 발전했고, 차이코프스키는 작품의 헌정 또는 서신을 통하여 이 부인과 교제했다. 폰 메크 부인으로부터 원조 약속을 받고 차이코프스키가 부인에게 헌정할 목적으로 작곡한 최초의 대작은 <교향곡 제4번>(1877)이다. 이 곡은 그 전에 발표한 3개의 교향곡을 훨씬 능가하는 역작이며 교향곡 작가로서의 그의 역량을 세계에 보여준 계기가 되었다.
같은 해, 그러니까 차이코프스키가 37세 되던 해에 그의 생애에서 최대의 불행이라고 할 수 있는 결혼 문제가 제기된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 해에 그는 결혼했다. 상대는 안토니나 이바노브나 밀르코바라는 28세 된 그의 제자였다. 결혼식은 7월 6일에 거행됐고, 식후에 두사람은 두 주일 예정으로 페테르부르크로 신혼여행을 떠났다. 안토니나는 남편에 대해 아무런 이해도 못했다. 두 주간의 신혼여행중에 그는 그녀로부터 도망치는 길은 죽음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일은 조금도 손에 잡히지 않았다. 밤마다 정처없이 방황하게 되었다. 극도의 신경쇠약에 걸린 것이다. 첫 서리가 내린 9월의 어느날 밤 그는 발작적으로 모스크바 강물에 뛰어들어 자살을 꾀했다. 결국 9월 말에 단신으로 페테르부르크로 도망치는 것으로 죽기보다 괴로웠던 결혼 생활을 끝냈다.
그 후 요양을 겸해 다시 유럽 여행을 떠났다. 스위스에 가 있는 동안 건강이 다소 회복되었고, 이탈리아에 가서 <교향곡 제4번>과 오페라 <예브게니 오네긴>을 완성했다.
1878년에 귀국한차이코르스키는 새롭게 불타는 창작의욕을 바이올린협주곡을 써냈고, 음악교수직도 그만 두고 작곡 활동에만 전념했다. 폰 메크 부인의 원조가 있었기 때문에 교편으로 생활비를 벌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그 해에도 그는 이탈리아 여행을 했는데 로마에서 <이탈리아 기상곡>을 작곡했다. 그밖에 고전파 양식에 의한 <현악 세레나데>, 러시아 산업 박람회에 즈음하여 쓴 축전 서곡 <1812년>등이 이 해의 작품이다.
1881년 그가 경애해 마지 않던 니콜라이 루빈슈타인이 별세했기 때문에 그는 장례식애 참석하기 위해 귀국했다. 그리고 이듬해에 걸쳐 니콜라이 루빈슈타인을 기념하여 <위대한 예술가의 추억>이란 제목의 피아노 3중중곡을 썼다.
그 후 수년간의 주요 작품은 오페라 <마제파>(1881-1883년), <모음곡 제3번>(1884년), 바이런의 시에 의한 <만프렛 교향곡>(1885년)등이다. 1885년 차이코프스키는 러시아 음악 협회모스크바 지부장이 되어 오랜만에 공직에 몸을 담았다. 그러나 이듬해에는 클린 교외의 마이다노보에 은퇴하여 그 곳을 생활근거지로 삼았다.
차이코프스키는 원래가 내성적인 성격이어서 그 때까지 연주활동을 한 적은 없었다. 그런데 1887년 우연한 기회에 자신의 오페라 <여화>의 초연을 지휘하면서부터 지휘자로서도 자신감을 갖게 되었다. 이를 계기로 그는 라이프찌히, 베를린, 함부르크, 프라하, 파리, 런던 등지에서 자기 작품을 지휘했다.
귀국한 차이코프스키는 주거를 마이다노보에서 그리 멀지 않은 프로로프스코의 전원으로 옮기고, 그해에 그의 최대 걸작 중의 하나인 <교향곡 제5번>을 썼다. 이 곡에는 인생의 고뇌를 초극하여 광명을 찾으려는 그의 씩씩한 힘이 넘쳐 있다. 이 곡을 완성한 후 프라하로 가서 <예브게니 오네긴>의 상연을 지휘했고, 귀국해서는 그의 두 번째 발레작품이며 <백조의 호수>와 더불어 러시아의 고전 발레의 명곡으로 뽑히는 <잠자는 숲속의 미녀>의 작곡에 착수, 이듬해 1889에 완성했다. 1891년에 오페라 <욜란타>와 발레 <호두까기인형>의 작곡에 착수했는데 도중에 미국 연주 여행을 떠나, 파리에서 연주회를 연 다음 뉴욕으로 건너갔다, 카네기 홀에서의 지휘는 대성공을 거두었다. 그 후 볼티모어, 워싱톤, 필라델피아, 보스턴 등지에서 공연하여 열광적 찬사를 받았다.
1893년 8월에 런던 필하보니아의 연주회를 지휘했는데 그때 케임브리지 대학으로부터 음악 박사 학위를 받았다. 그리고 10월 28일 그의 새로운 교향곡이 그 자신의 지휘로 페테르부르크에서 초연되었다. 그리고 1주일 후에 갑작스런 죽음이 차이코프스키를 엄습했다. 생수를 마신 것이 원인이 되어 콜레라에 걸려 1893년 11월 6일에 사망했다. 뭔가 숙명적인 것을 생각게 하는 이 마지막 교향곡은 <비창>이라 불리게 되었다. 그것은 생전에 작곡자가 생각하고 있던 표제이기도 했다.
차이코프스키 음악에 대한 공적은 교향곡와 발레음악 분야에서 두드러진다. 교향곡에 있어서는 스승인 루빈슈타인의 독일 낭만파적 경향에서 벗어난 글린카 이래 러시아 국민주의 바탕위에 독특한 세계를 구축하였다. 그것은 유럽 전통 위에 발전한 러시아적 형상화이며 전개라고 볼 수 있다. 또 발레음악에는 국민악파 작곡가들에게서는 찾아볼 수 없는 서정성이 담겨 있다. 그의 작품은 한마디로 말해서 어디까지나 러시아적이면서도 유럽 전통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이것이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그가 국제적 명성을 유지하고 있는 참된 이유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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