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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동진)

출생국가

  대한민국

활동년도

  1913-

활동년도

  168 곡

활동년도

  2

        
 

가곡 ‘가고파’의 작곡가로 잘 알려진 김동진은 1913년 생이다. 90세를 넘긴 이 원로음악인의 생애는 일제강점기와 해방, 그에 이어지는 남북분단이라는 격정(激情)의 한국사와 맞물려 있다.


평남 안주에서 출생한 그는 오로지 음악적 삶을 살았을 뿐이지만 어딜 가든 한국 근현대사의 파란만장한 역사적 현장의 한복판이었다.


특히 그는 만주에서 평양으로 또 평양에서 서울로 생사를 넘나들던 기억들, 평양에서 기독교 집안이란 이유로 숙청돼 음악가 생활을 접어야 했던 기억들, 서울에 와서는 ‘월남 작곡가’라고 심한 텃세를 당했던 기억들을 떠올릴 때 가슴 깊은 곳 아픈 상처를 반추하는 듯한 말투와 표정이었다.


그가 다닌 숭실학교에 본래 음악과가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과외활동으로 밴드를 비롯한 음악활동이 매우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덕분에 전문음악인들이 대거 배출됐다. 안익태·현제명 등이 숭실학교 출신이다. 김동진은 숭실학교 당시의 생활들, 음악선생님들, 음악수업의 내용, 음악활동, 조율 수업 등 당시의 생활상을 자세히 구술해주었다.


그에 따르면 한국전쟁 기간 동안 예술인들은 군대의 일원으로서 위문공연을 하면서 예술활동을 펼쳤다. 부산에 근거지를 둔 해군정훈음악대는 이와 관련해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하지만 김동진이 속했던 대구 군가보급단 시절의 구술은 이번에 새롭게 밝혀진 사실들이다.


군가보급단은 위문공연뿐 아니라 시민을 위한 일반 연주회도 담당했다. 대부분 음악가들이 부산으로 피란을 간 상태라서 대구에는 작곡·기악하는 사람만 몇명 있었고 성악가는 한 사람도 없었다. 그래서 하대응이 지휘하던 가톨릭합창단이 군가보급단의 성악 분야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이북 출신 음악가’라는 올무는 오랜 기간동안 김동진의 음악활동을 제한시키는 요소로 작용했다. 김동진의 대구 시절, 군가공모에 관한 구술은 그 아픈 기억들의 한 단면이다.


“육군정훈감실에서 ‘6·25 노래’를 모집했는데 내가 작곡한 노래가 당선이 됐어요. 내가 그거 한 이유도 이북에서 왔으니까 누구도 인정해주지 않거든요, ‘이남 음악가’들은. 그래 나는 실력으로 해보겠다 그래서 당선이 됐어요. 그 후에 또 ‘육군가’도 모집했는데 그것도 내가 당선이 됐단 말이야. 그러니까 이남의 작곡가들이 시기하기 시작한 거야. 내가 이북에서 왔으니까 어떻게 하든지 몰락해서 활동도 못하게 하려고 얼마나 많이 수모를 받았는지 몰라요.”


김동진의 노래가 채택된 후에도 음악인들의 반대가 심했다. 군에서는 재판까지 열었다. 재판에서 김동진은 “김순남의 ‘적기가’와 유사하다, 소련식이다, 북한 노래풍”이라는 식으로 많은 공격을 받았다. 그 와중에 만주에 있을 때 김동진의 도움을 받았던 음악가 ㄱ씨도 합세해서 김동진을 공격했다. 김동진은 음악적 음해를 넘어선 인간적 배신에 몸서리쳤다. 재판은 결국 김동진의 승리로 끝났다. 그래도 ‘빨갱이’라는 투서가 이어졌다. 심지어 “김동진이 ‘김일성 노래’를 작곡한 사람”이라는 오해도 받았다.


무엇보다 김동진은 같은 숭실학교 출신 선배로서 ‘이남 음악가’의 중심에 섰던 ㄴ씨가 자신의 음악활동을 지속적으로 방해했던 이유에 대해 아직도 이해하지 못한다. 공연을 위해 몇몇 연주가들에 대한 도움을 요청했을 때도 ㄴ씨는 단호히 거절했다. 국립극장 단장이었던 서항석으로부터 오페라 ‘심청전’ 의뢰를 받았을 때도 ㄴ씨는 전면에 나서서 공연을 무산시켰다. 그 이후에도 ㄴ씨는 사사건건 김동진의 활동을 막았다.


김동진은 “우리나라 사람이 그렇게 마음이 좁고 후배를 도와줄 줄 모르는지 몰라요. 조금 재간이 있으면 긁어내리고 우리나라 민족성이 그런 게 있는 것 같아요”라고 말했다. 오랜 기간 간직했던 ‘이남 출신 음악가’들에 대한 섭섭함의 표현이리라.


그가 음악가로 활동하던 시기는 30년대부터이다. 그 시기 음악계 소식은 당시 일간지 등에 간헐적으로 소개됐던 연주회에 대한 기사가 전부다. 구체적인 사료가 전무한 초창기 한국양악사에 있어서 당시를 온몸으로 살았던 김동진의 한마디 한마디는 큰 무게를 지닐 수밖에 없다. 당시 음악인들에 대한 그의 생생한 기억들 가운데 우리 음악사 서술에 중요한 실마리를 제공해주는 부분도 적지 않다.


예컨대 김동진이 만주에서 함께 활동했던 음악가인 작곡가 김대현·윤용하는 음악사에서 제대로 다루어지지 못한 인물들이다. 이에 대해 김동진은 “김대현은 일본의 음악학교를 졸업하고 만주의 한국인 국민학교 선생으로 재직하면서 동요 작곡에 주력하고 있었다”고 했다. 또 “윤용하는 한국 민단에서 일하면서 작곡가로 활동하고 있었고, 거기서 세 사람이 공동작업으로 ‘칸타타’를 작곡했다”고 밝혔다.


김동진과 일본에서 함께 유학했던 바리톤 ㄷ씨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술회하고 있다. 거대 서사 속에 함몰되기 일쑤인 이면사와 개인사를 볼 수 있는 것도 구술사의 매력이랄까.


“만주에 있을 적에 ㄷ씨는 그 학교를 졸업하고 한참 있다가 만주로 왔어요. 신경교향악단 합창부에 독창자로 와 있었는데, 그이는 술만 먹으면 사람이 변해요. 주정을 잘하는데 무서운 게 없어. 그만 우리 신경음악단 단장한테도 달려들고 말이요. 그래 거기서 매도 맞고 환영을 못받았어, 성격이 괴상해서. 술 먹고 우리 집에 와서 한달 동안 같이 있는데 집 다 부수고…. 나중에 내가 평양에 있을 적에 평양으로 왔는데 내 생각엔 평양 와서도 별로 환영을 못받았을 거요.”


그밖에 영화음악과 관련된 구술도 매우 흥미로웠다. 당시 음악가들은 대거 영화음악에 관여했다. 김동진은 김지미 주연 영화에서 음악을 맡았는데 지휘자 역할로 직접 출연까지 했다. 음악가가 영화음악을 작곡한다고 주변에서 신랄하게 비난하던 시절이었다.


-김동진은 누구-


김동진의 평생 화두는 ‘우리음악 찾기’였다.


그는 숭실전문학교 4학년 때 명창 이동백이 평양의 ‘금촌대좌’라는 일본식 극장에서 공연한 창극 ‘심청전’을 다다미방 같은 객석에서 보고 크게 감명받았다. 그때부터 양악 작곡가이지만 평생을 우리음악 찾기에 심혈을 기울였다. 한국양악사에 기록될 만한 발언들이 쏟아졌다.


첫번째, 김동진은 만주 시절(1939~45) 판소리를 오선보로 채보했다. 그 이전에도 국악의 몇몇 작품이 개별 음악인들에 의해서 채보됐으나 판소리 한 작품 전체가 오선보로 기록된 것은 김동진이 최초였다. 이후 정부 주도로 국악 채보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게 60년대 초반이므로 김동진의 작업은 선구자적인 것이었다.


그가 판소리 채보를 시작한 이유는 ‘심청전’을 오페라로 만들고 싶어서였다. 작곡 과정에서 “암만 해도 서양 냄새가 너무 나서” 본격적으로 판소리 공부를 시작했다. ‘오케이(OK)레코드’판 ‘심청가’를 2년에 걸쳐 채보했다.


두번째, 국악·양악을 함께 연주하는 실험적 시도는 김동진에 의해 50년대에 시작됐다. 59년 김동진은 단가 ‘천하태평’을 피아노 반주로 편곡, 명창 김소희와 함께 연주했다. 이는 평균율이라는 서양의 조율법과 한국적 음률 사이의 조화를 추구했던 작곡가 김동진의 첫번째 작업이었다.


또한 같은 해 그는 한국 최초로 ‘가야금 협주곡’을 작곡, 연주했다. 양악기·국악기를 함께 연주한다는 발상 자체가 당시로서는 파격적이었다. 그때 양악 오케스트라와 함께 가야금을 연주했던 인물이 얼마 전 타계한 가야금 명인 성금연이었다. 양악은 우월하고 국악은 미개한 음악이라는 생각이 팽배했던 음악계에 센세이션을 불러일으켰다.


이러한 작업들은 ‘신창악 운동’이라는 김동진 특유의 세계로 열매맺는다. 김동진은 자신의 오페라 작품 ‘심청전’ ‘춘향전’을 신창악이라고 명명했다. ‘서양 것과는 분명히 차별화된 우리 음악을 만드는 것’. 이것이 김동진의 작곡철학이다.


“양악에는 멋이라는 말이 없잖아. 물론 자기들 나름대로 기교도 있고 하지만 우리나라의 독특한 멋이라는 것, 멋 부리는 장면, 이것이 양악보다 한수 위지. 성악가는 그걸 표현할 줄 알아야 해요. 그렇지만 그것이 쉽지 않아요. 판소리는 10년을 해야 멋을 안다는 말이 있잖아요. 그러니 하루아침에 되겠어?”


〈전정임/ 충남대 교수·음악평론가〉경향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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