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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Weber, Carl Maria von (베버)

출생국가

  독일

활동년도

  1786-1826

활동년도

  433 곡

활동년도

  223

        
 

독일 초기 낭만파 음악의 작곡가중의 한사람으로 베토벤, 슈베르트 등과 거의 동시대를 살다간 베버(Carl Maria von Weber, 1768-1826)는 1768년 11월 18일에 오이틴에서 태어났다. 베버는 자유분방한 집안의 출신으로 이름에 폰(von)이 붙어있는 것으로도 알 수 있듯이 그의 가문은 귀족이었다. 부친 프란츠 안톤 베버도 남작의 작위를 가지고 있었다. 프란츠 안톤 베버는 활동적이고 모험심이 강한 사람으로 군인, 음악가, 관리로서 다양한 삶을 살았으나 크게 성공하지는 못하였고, 다만 그의 아들들을 모차르트와 같은 신동으로 키우려는 꿈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초혼에서 얻은 아이들에게서는 그의 기대가 이루어지지 않았고 50세 넘어서 브렌너와 결혼해서 얻은 카를 마리아 폰 베버에게서 그의 꿈은 실현되었다.
그러나 가족이 방랑생활을 계속하고 있었기 때문에 규칙적으로 지속된 교육을 받지는 못한 베버는 4세가 될 때까지 걷지 못할 정도로 허약해서 특별한 음악 재능을 보이지는 못했으나, 6세가 되는 해에 오르간 연주자이자 오보에 연주자였던 포이시켈에게 정식 음악지도를 받으면서 재능을 발휘하기 시작하였고, 이미 이 시기에 오르간 곡을 한 곡 썼다. 이어서 미하엘 하이든, 발리스하우저, 포글러 등으로부터 작곡공부를 하게 되었다. 특히 포글러에게서 신출내기 작곡가 베버는 신기한 악기의 편성법과 그리고 극장풍의 효과를 배워 음악 개혁에 관한 이념을 알게 되었다.
13세에 첫 오페라를 발표하였고, 1800년에 두 번째 오페라 <숲속의 소녀>에 이어 <페터 슈몰과 이웃들> 과 몇 곡의 가곡, 합창곡, 그리고 짧은 피아노 곡들을 썼다.
17세 되던, 1804년 6월 브레슬란 오케스트라의 악장 자리를 수락하여 그곳에 부임하였으나 그의 개혁 의지가 강한 반대에 봉착하자 곧 사임했다. 1806-1807년 기간에는 칼스루에(실레지엔의 상류지방)에서 오이겐 폰 뷔르텐베르크 공의 집사직을 얻어 일하였다. 이곳에서 2개의 , 몇 편의 연주곡, 호른 협주곡을 작곡했고. <교육용을 위한 6개의 피아노 2중주>, 12개의 가곡, 칸타타, 연극을 위한 부수음악, 오페라 <질바나>를 썼다. 자신의 연주를 위해서도 <모멘토 카프리치오>, <대 플로네이즈>, <피아노협주곡 B♭>장조를 작곡하였고, 음악에 대한 비평과 논문을 발표하였다. 칼스루에에서 그는 프란츠 단치와 친교를 맺었으나 불행하게도 여러 가지 불상사로 뷔르텐베르크 공의 영지에서 영원히 추방당했다.
베버는 만하임, 하이델베르크, 다름슈타트 등지로 갔으며, 다름슈타트에서 포글러 선생 밑에서 공부를 다시 시작했는데, 같은 시기의 제자들 중에는 마이어베어도 있었다. 그 무렵 <피아노 협주곡 제1번 C장조>를 완성시켰고, 6개의 <바이올린과 피아노를 위한 소나타>, <클라리넷 협주곡 E♭장조>, 징슈필 <아부 하산>을 작곡했으며, 피아니스트로도 서서히 주목을 받게 되었다. 1811년 2월 다름슈타트를 떠나 연주여행에 나섰으며 밤베르크, 뮌헨 등지를 방문했다. 뮌헨에서는 클라리넷 주자 하인리히 벨만과 함께 콘서트를 열었고 프로그램에는 자작의 <클라리넷 콘체르토>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 작품이 크게 성공하자 바이에른 왕은 그에게 두 곡의 클라리넷 협주곡을 의뢰했다. 베버는 오케스트라로부터도 여러 가지 악기의 협주곡을 의뢰받았지만 결국 바순 협주곡밖에는 작곡하지 않았다. 비스바덴의 악장 자리를 거절하고 다시 연주여행을 떠난 베버는 처음에 스위스를, 그리고 벨만과 함께 프라하, 라이프찌히, 드레스덴, 고타, 바이마르, 프랑크푸르트, 뉘른베르크, 밤베르크, 베를린 등 각 도시를 돌았다.
1812년 2월 도착한 베를린에서 <피아노 소나타 제1번 C장조 op. 24>을 작곡했으며, 12월에는 고타에서 <피아노 협주곡 제2번>을 연주한 뒤 1813년 1월 프라하에 도착했다. 공석이 된 프라하의 극장장겸 지휘자가 되어 1816년까지 그 자리에 머무르면서 그 극장의 조직을 근본적으로 개혁했으며 일류 가수들을 모아들였다. 그 가수들 중에는 후에 그의 아내가 된 소프라노 카롤리네 브란트도 있었다. 베버는 3년 동안 30명이 넘는 작곡가에 의한 62개의 오페라를 상연했다. 달레라크, 그레트리, 이수아르, 카텔, 스폰티니, 케루비니, 메홀, 보엘디외 등 대부분 프랑스인 또는 프랑스에 귀화한 사람들의 작품을 올렸고, 1814년에는 모차르트의 <돈죠바니>, 베토벤의 <피델리오>를 공연하였다. 이러한 공연을 통하여 베버 자신도 이들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프라하 시절의 중요한 작품으로는 남성합창곡 <리라와 검>, <클라리넷 5중주 B♭장조>, 칸타타<전쟁과 승리>등이 있다. 여러 가지 불상사로 인해 그 자리에서 쫓겨난 그는 1816년 6월 베를린으로 이주하여 <클라리넷과 피아노를 위한 대협주적 2중주곡>과 <피아노 소나타 제2번 A♭장조 op.39>, <피아노 소나타 제3번d단조 op.49>, 여러 편의 가곡을 썼다.

1816년 12월 25일 베버는 그의 마지막 공적 지위인 드레스덴 작센 궁정의 악장에 임명되었으며 1817년 1월 30일 베버는 메윌의 <이집트의 요셉>을 지휘하여 드레스덴에서의 데뷔를 장식했다. 그 해 11월 4일에는 프라하에서 카를로네 브란트와 결혼도 하였다. 드레스덴에서도 그가 원하는 개혁을 속행했는데 그것은 19세기 말의 구스타프 말러의 개혁과 비견되는 것이었다. 드레스덴에서 베버는 이탈리아 오페라를 선호하는 귀족들의 취향을 바꾸기 위해서 새로운 형태의 독일 낭만 오페라를 쓰기로 결심하고 만든 작품이 1821년에 완성된 <마탄의 사수>이다. 베버는 결혼 직후에 이 작품에 착수했다. 원숙감을 주는 <두 개의 미사곡E♭장조와 G장조>는 각각 1817년부터 1818년까지, 그리고 1818년부터 1819년까지 만들어진 작품이다. <마탄의 사수>의 작곡을 계속하면서 베버의 관심은 기악곡 쪽으로 향했다. 이렇게 해서 피아노를 위한 <화려한 폴라카 op. 72>, <화려한 론도 op. 62>, <무도에의 권유>, <플루트와 첼로, 그리고 피아노를 위한 3중주곡>이 작곡된다. 그는 또 볼프 P. A. Wolff의 프레치오자의 부수음악을 작곡했고 1821년 6월 18일 베를린에서 <마탄의 사수>가 초연되는 날에는 피아노와 오케스트라를 위한 <콘체르트슈티크 f단조>를 완성했다.
<마탄의 사수>는 독일뿐만 아니라 런던에서도 연주될 정도로 대성공을 거두었고, 독일 낭만 오페라의 효시적 작품으로 후기의 작곡가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영국의 코벤트가든 극장은 베버에게 영국 오페라를 의뢰하였고, 이를 위해 베버는 <오베론>을 써서 자신의 지휘로 런던에서 초연하였다. <오베론>을 작곡할 무렵 베버는 오랜 피로와 결핵 등의 병으로 자리에 누웠고, 이 후 1826년 런던에서 사망하였다. 1844년에 바그너는 베버의 유해를 드레스덴으로 옮겼고, 그를 위해 무반주 남성합창인 <베버의 죽음에 부쳐>와 베버의 오페라<오이리안테>에서 주제를 차용하여 <애가>를 작곡하였다.

♣2.베버의 음악적 특징
베버는 고전파 시대에 나서 낭만파 음악의 새로운 세계에 문호를 개방한 예술가였다. 그는 음악에 있어서 극적이며 서사적인 표현에 성공했으며, 교향시의 방향에 새로운 운동을 보였다.
그는 오케스트라의 색채적인 처리에 큰 재질을 가지고 있었다. 멘델스존은 그를 가리켜 ‘낭만주의 관현악의 무기고’라 평했거니와 그의 독창적인 오케스트레이션을 창안하였다. 거기에는 박력이 있고 명암이 뚜렷할 뿐만 아니라 모든 악기의 고유한 음빛깔을 잘 활용하였다. 즉 몽상적인 뉘앙스에 있어서나 현실을 묘사하는 수법 등 낭만 음악이 가진 특성을 잘 살렸다. 그의 멜로디는 모차르트의 흐름을 따라 유연하고 자유분방한데, 대담한 화성법과 깨끗하고 품위 있는 가락에는 강한 개성이 담겨있다. 악기사용법에 있어서는 가장 낮은 데서부터 가장 높은 음역을 자유자재로 구사하여 새로운 경지를 개척하였다.
베버의 피아노곡은 베토벤과 모짜르트의 소타나처럼 확고하거나 큰 작품군을 이루지도 못하고 변주곡, 론도, 폴로네즈, 왈츠, 무곡, 연탄곡 등으로 분산되어 있다. 그것이 그의 피아노곡이 그다지 유명하지 않은 이유의 하나이다. 베버의 피아노곡의 특징은 기묘하게도 서로 용납하지 못하고 때로는 모순에 가득차 있지만 더욱 적극적으로 평가되어야 한다. 그의 명기교는 피아노 협주곡 제2번의 론도나 피아노 소나타 제1번의 미뉴에트에서 볼 수 있는 극히 넓은 음정, 3도와 여러 옥타브의 글리산도로 급속하게 연주되는 음계, 약동적인 프레이즈, 그리고 분산화음 등을 많이 사용하는 것이 특징이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오케스트라의 색채에 대한 극히 개성적인 기호도 분명하며 피아노곡의 서법도 항상 완전무결했기 때문에 더욱 돋보이는 오페라도 상기해야 한다. 이러한 견지에서 보자면 베토벤과는 반대로, 그리고 베버는 자기 자신이 아니라고 생각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매우 위대한 양식가(樣式家)였다.
이밖에 시대의 풍조를 중시하고 여기에 충실했던 베버는 종종 약간의 이국취미적인 표현을 하기 위해서 상상력을 발휘했다. 가령 피아노곡 속에는 스페인, 헝가리, 폴란드, 러시아, 보헤미아적인 것도 있다. 거기에서도 모든 통합이라는 베버의 전형적인 특성, 즉 용감성과 화려함, 그리고 명확한 기법과 완전무결한 취미에 그저 감탄할 뿐이다.
베버는 작곡가로서 뿐만 아니라 지휘자로서도 이름이 있는데 그는 근대 지휘법의 기초를 세운 사람이었다. 그는 본격적으로 지휘봉을 사용한 사람이었다. 지휘가 단지 단원을 통솔하는데 그치지 않고 작품을 하나의 이념으로서의 창조적인 행위로까지 높인 공적도 인정해야 할 것이다.
베버의 작품이 남긴 흔적은 당대 음악사에 깊이 새겨져있는데, 베를리오즈와 바그너에게 오케스트라가 가지는 가능성과 악극의 어법을 제시해 주었다. 또한 쇼팽과 리스트의 피아노 음악의 양식에도 영향을 미쳤으며, 애국적인 칸타타<전쟁과 승리>등을 작곡하며 독일 정신 교양과 민속적인 음악의 새 각도에서 큰 공적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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