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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Wagner, Wilhelm Richard (바그너)

출생국가

  독일

활동년도

  1813-1883

활동년도

  4,553 곡

활동년도

  535

        
 

1813년 5월 22일 라이프치히에서 출생하였다. 어려서 드레스덴으로 이사하여 9세 때 피아노를 배우기 시작하고, 18세 때 라이프치히대학교에 들어가 음악과 철학을 공부하였다. 1832년부터 작곡을 시작하여 첫 오페라 《혼례 Hochzeit》를 프라하에서, 1834년에는 제2작인 《요정 Die Feen》을, 1836년에는 제3작인 《연애금제(戀愛禁制) Das Liebesverbot》를 뷔르츠부르크에서 완성하였다. 1836년 여배우 미나 플라너와 결혼하였으나 불행하게 끝났고, 1839년 《리엔치 Rienzi》를 작곡하던 중 러시아령(領)의 리가에서 파리로 갔으나 생활은 불우하였다. 그러다가 1842년 《리엔치》가 드레스덴오페라극장에서 상연된 것을 계기로 드레스덴으로 이사하여 궁정 오페라극장의 지휘자가 되었다. 그로부터 《방황하는 네덜란드 사람 Der Fliegende Holländer》을 직접 지휘하여 초연했고(1843), 다음 작품 《탄호이저 Tannhäuser》는 1845년에 상연되었다. 또, 당시에는 이해하기 어려운 작품으로 여겨지던 베토벤의 《제9교향곡》을 지휘하여 그 진가를 일반에게 알렸다.

1849년 드레스덴에서 혁명이 일어나자 바그너도 이에 참여하였다는 혐의로 체포령이 내렸다. 이를 미리 알고 피신하여, 리스트의 집에서 잠시 신세를 지다가 스위스의 취리히로 갔다. 여기에 머무는 동안 그를 돌봐준 베젠동크부인과의 이루어질 수 없었던 사랑을 《베젠동크가곡집》과 악극(樂劇) 《트리스탄과 이졸데 Tristan und Isolde》에 담아 승화시켰다. 한편, 1850년에는 바이마르궁정극장에서 리스트의 지휘로 《로엔그린 Lohengrin》이 상연되고, 1861년에는 《탄호이저》의 파리 초연을 위해 《바카날》을 작곡하였는데, 이 곡은 오페라극장에서 3회나 상연되었다. 또 같은 해에 《트리스탄과 이졸데》 상연을 위해서 빈에 가기도 했으나 상연은 실현되지 못하였다.

1864년 봄, 추방이 해제되면서 바이에른 국왕 루트비히 2세의 초청으로 뮌헨에 정착하고 작곡에 몰두하였으나 그를 백안시하는 자가 많아 이듬해 1865년 스위스의 루체른 교외의 트리프셴으로 이사하였다. 그 해에 뮌헨에서 H.뷜로의 지휘로 《트리스탄과 이졸데》가 상연되어 그의 명성은 더욱 높아졌다. 또 1868년에도 역시 뷜로의 지휘로 《뉘른베르크의 마이스터젱거 Die Meistersinger von Nürnberg》가 초연되었으며, 1870년에는 리스트의 딸이자 뷜로의 부인이었던 코지마와 재혼하였다(전처 미나는 1866년에 사망하였다). 이때 그에게는 이미 코지마와의 사이에 3명의 자녀가 있었으며, 그 중에서도 특히 1869년에 출생한 지크프리트는 훗날 아버지의 음악 지휘자 겸 작곡가가 되었다.

1870년 바그너는 아들의 생일을 축하하여 《지크프리트의 목가 Siegfried Idyll》를 작곡하였다. 바그너는 자기 악극을 상연할 극장 건립을 추진하여, 마침내 1876년 바이에른의 소도시 바이로이트에 극장을 완성시켰다. 이 극장 개관기념으로 대규모의 악극 《니벨룽겐의 가락지 Der Ring des Nibelungen》 전곡을 상연하였는데, 전 유럽의 명사들이 몰려와서 일대 성황을 이루었다. 그리고 1882년에는 《파르지팔 Parsifal》이 상연되었다. 이것이 상연된 후 요양차 물의 도시 베네치아로 갔으나, 1883년 2월 13일 벤다르민궁(宮)에서 70년의 생애를 마쳤다. 바그너는 거대한 규모의 악극을 여러 편 남겼는데, 이 모든 악극의 대본을 손수 쓴 것은 아마도 그의 악극의 이상을 실현시키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또 많은 음악론도 집필했으며, 이에 따르면 그가 생각하고 있던 '전체예술(종합예술)'이란 대략 다음과 같이 요약된다. ① 예술이란 일부 계층의 오락도구가 아니라 사회 각계 각층을 망라한 국민 전체의 예술적 표현이어야 한다. ② 가장 근원적이며 순수한 국민적 시작(詩作)의 소재는, 모름지기 한 시대의 성격에 사로잡히지 말고 본질적인 것을 상징적으로 표현하는 신화(神話)이어야 한다. ③ 예술이란 근원적이며 인간적인 것, 또한 인간 전체의 표현이어야 한다. 단순히 개개의 예술(이를테면, 조형예술·시·음악 등)이 고립된 채로는 전체 인간을 표현할 수 없다. 이들 예술이 모두 하나로 뭉쳐져 작품이 만들어져야 한다. ④ 개개의 예술은 근원적으로는 공통의 기반을 가지고 있다. 멜로디는 말에서 생겨난 것이다. 시는 뜻깊은 선율을 낳기 위해서는 두운(頭韻)을 써야 한다. 관현악은 그리스비극에 있어서의 합창과 같은 몫을 하며, 이야기의 일반 인간적(一般人間的)인 것을 표현하여, 과거를 회상케 하며 또한 미래를 예감하도록 한다. ⑤ 일반적인 사상면에서는 쇼펜하우어의 의사부정적(意思否定的)인 염세철학과 그리스도교, 그리고 불교에서 영향을 받아 인간존재의 비극적인 모순을 생각하였다. 그렇지만 독일 낭만파의 한 사람으로서 그는 ‘구제의 이데아’를 그 작품의 중심에 두었다. ⑥ 음악은 여성이며 시는 남성이다. 양자의 결합으로 비로소 예술은 성립된다. 음악은 시의 의도를 존중하여 시에 봉사하여야 하고, 음악 스스로가 규정적(規定的)으로 작용하지는 않는다.

이와 같은 그의 예술론은 주로 《로엔그린》 이후 《트리스탄과 이졸데》가 창작되기까지의 창작활동 중지기간에 씌어졌다. 이 예술론의 사상이 반드시 그의 전 작품에 걸쳐 구현된 것은 아니지만, 작품 중의 다음과 같은 양식적 특색은 이 사상을 뒷받침하는 것으로 생겨난 것이다. ① 극의 전개와 심화에 관현악을 참가시키기 위하여 도입동기(導入動機)를 유효적절하게 썼다. ② 무한선율(無限旋律)이라고 그 스스로가 명명한 양식에 의하여 음의 흐름을 중단시키지 않고 극의 진전을 방해하지 않도록 하였다. ③ 화성의 표현능력을 확대시켰다. 특히 대담한 반음계적 사용으로 음의 조성은 붕괴 직전까지 이르렀다. ④ 관현악 구성은 대규모화하여 표현의 폭의 넓이와 섬세함에는 종전의 낭만파음악에서는 볼 수 없었던 능력을 지니게 되었다.

그는 음악가로서는 보기 드문 명문가로서 음악작품의 대본 이외에도 많은 예술론을 저술하여 《독일음악론 Über Deutsches Musikwesen》(1840) 《예술과 혁명 Die Kunst und die Revolution》(1849) 《미래의 예술작품 Das Kunstwerk der Zukunft》(1850) 《오페라의 사명에 대하여 Über die Bestinnung der Oper》(1871) 《오페라와 희곡 Oper und Drama》(1851) 《독일예술과 독일정치 Deutsche Kunst und Deutsche Politik》(1868) 등의 저서를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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