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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ach, Johann Sebastian (바흐)

출생국가

  독일

활동년도

  1685-1750

활동년도

  10,479 곡

활동년도

  1,812

        
 

Johann Sebastian Bach
바로크 시대 독일의 작곡가.

1685. 3. 21 에르네스티네 작센 튀링겐 아이제나흐~1750. 7. 28 라이프치히.


동시대인들 사이에서 뛰어난 하프시코드 연주자, 오르간 연주자, 오르간 제작자로 존경받았지만 오늘날에는 〈브란덴부르크 협주곡 Brandenburg Concertos〉․〈B단조 미사 Mass in B Minor〉․〈평균율 클라비어 곡집 Das Wohltemperierte Klavier〉 등 수많은 종교음악과 기악곡을 남긴 가장 위대한 작곡가의 한 사람으로 추앙받고 있다. 음악사의 전성기를 살았던 그는 이전 시대의 작곡가들이 발전시킨 주요양식과 형식, 민족적 전통들을 종합해 풍부하게 만들 수 있었다. 그는 유명한 음악가 가문에서 태어났으며, 아들 빌헬름 프리데만 바흐, 카를 필리프 에마누엘 바흐, 요한 크리스티안 바흐도 음악가로서 명성을 떨쳤다.







소년시절

아이제나흐 궁정과 지방 의회에 고용된 현악기 연주자 요한 암브로지우스 바흐와 엘리자베트 래머히르트 사이의 막내 아들로 태어났다. 1692(또는 1693)년부터 학교 공부를 시작했고 잦은 결석에도 불구하고 학교 성적은 좋았다. 그가 당시 받은 음악교육에 관해서는 확실하게 알려진 것이 없으나 아버지에게 현악기 연주의 기초를 배우고 게오르크 교회에 다닌 것으로 여겨지는데 1703년까지 요한 크리스토프 바흐가 오르간 연주자로 있었다. 1695년경 양친이 모두 죽자 오르드루프의 오르간 연주자였던 맏형 요한 크리스토프(1671~1721) 밑에서 자랐다. 크리스토프는 한때 영향력있는 건반음악 작곡가인 요한 파렐벨의 제자였으며, 동생 제바스티안에게 건반악기를 가르쳤다. 어린 바흐는 다시 뤼네부르크의 미하일 교회 부속학교에서 공부를 계속했으며, 목소리가 좋아 1700년까지 가난한 소년들로 구성된 성가대의 일원이 었다. 그후 목소리에 이상이 생겨 학교를 떠났으나 한동안 뤼네브르크에 머물면서 방대한 최신 교회음악 자료들을 소장하고 있던 그곳 학교 도서관에서 공부했다. 이때 요하네스 교회의 오르간 연주자인 게오르크뵘의 연주를 들었던 것 같으며, 유명한 오르간 연주자이자 작곡가인 요한 아담 라인켄의 연주를 듣기 위해 함부르크를 방문했고 아울러 셀 공작의 프랑스 오캐스트라의 연주도 들었다. 1702년 늦은 여름, 바흐는 이미 능숙한 오르간 연주자가 되어 다시 튀링겐으로 돌아왔다. 1703년 3월 4일경 그는 바이마르의 요한 에른스트 공작 오케스트라의 일원이 되었다. 이 자리는 단지 임시 방편에 지나지 않았으며 이미 그의 마음은 당시 아른슈타트의 노이 교회에서 제작중이었던 오르간에 가 있었다. 오르간이 완성되자 바흐는 그 악기를 시험해 보았고, 1703년 8월, 18세의 나이로 오르간 연주자에 임명되었다.




아른슈타트 시대

튀링겐 삼림지대의 북쪽에 위치한 아른슈타트에서 바흐는 특히 오르간 음악에 몰두했다. 뤼네부르크에 있는 동안 그는 북독일 오르간 악파의 가장 중요한 오르간 연주자 디트리히 북스테후데의 연주와 작품을 직접 접할 기회가 없었지만 1705년 10월 한 달 동안의 휴가를 얻어 뤼베크까지 300㎞나 되는 거리를 걸어가 마침내 그의 연주와 음악을 듣게 되었다. 1706년 1월 중순이 되어서야 돌아온 것으로 보아 그곳에서 체재가 그에게 유익했던 듯하나 그는 그동안의 부재와 그밖의 일들로 문책을 받았다. 찬송가의 선율에 마음대로 화성을 붙여 회중이 따라 부르기 어렵게 만든다는 것과 무엇보다도 칸타타를 한 곡도 작곡하지 않았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그러나 진정한 이유는 그가 오르간에 집착한다는 것과 자신이 요구하는 음악수준에 미치지 못하는 그 지역 가수․연주자들과의 불편한 관계 때문이었던 것 같다. 1705년 여름에는 한 바순 연주자에게 공격적인 언사를 한 것이 거리의 난투극으로까지 발전한 일도 있었다. 이런 일들로 인한 문책에 대해 그의 답변은 만족스럽지도 못하고 성의도 없었지만 뛰어난 재능을 가진 음악가를 잃고 싶지 않았던 고용주측은 그를 해고하지 않았다. 이 기간 동안 바흐는 튀링겐 지역의 음악문화를 흡수하는 한편 북스테후데로부터도 많은 것을 얻었다. 1708년경에는 독일 선배 작곡가들에게 배울 수 있는 모든 것들을 얻었으며, 최초로 독일의 북부와 남부 양식을 통합했다. 아울러 프랑스의 오르간 음악과 기악음악을 공부하기도 했다.




초기의 작품으로는 〈사랑하는 형의 여행에 즈음한 카프리치오 Caoriccio Sopra la lontananza del suo fratello dilerrissimo〉(BWV 992, 1704), 〈얼마나 밝게 빛나는가 Wie Schon leuchtet〉에 의한 코랄 전주곡(BWV 739, 1705경), 오르간을 위한 〈전주곡과 푸가 G단조〉(BWV 535a, 1707 이전) 등이 있다. ('BWV'번호는 독일의 음악학자 볼프강 슈미더에 의한 표준적인 바흐 작품 번호로 독일어 Bach-Werke-Verzeichnis의 약자임).




뮐하우젠 시대

1707년 6월 튀링겐의 뮐하우젠에 있는 블라지우스 교회에 일자리를 얻었으며 그해 10월 17일 도른하임에서 사촌인 마리아 바르바라 바흐와 결혼했다. 뮐하우젠에서는 한동안 모든 일이 순로로운 듯했다. 이때 작곡한 칸타타들은 성서 혹은 코랄 가사를 기초로 한 보수적인 틀을 고수하고 있으며, 훗날 그의 칸타타에 나타나는 '근대' 이탈리아 오페라 형식의 영향은 보이지 않는다. 오르간을 위한 〈파시칼리아 C단조〉(BWV 582), 역시 오르간을 위한 〈토카타와 푸가 D단조〉(BWV 565), 〈전주곡과 푸가 D장조〉(BWV 532) 등이 당시의 작품으로 추정되고 있다. 칸타타 71번 〈하나님은 나의 왕이시도다〉(1708. 2)는 시의회가 비용을 부담하여 출판된 작품이다. 이유는 분명하지 않지만, 바흐는 블라지우스 교회를 사임하고 곧바로 바이마르로 갔다.




바이마르 시대

바이마르에서는 당초부터 궁정 오르간 연주자 겸 오케스트라 단원으로 시작했다. 빌헬름 에른스트의 배려로 처음 몇 년 동안 오르간에 몰두했다. 바이마르에 있는 동안 가끔 바이센펠스를 방문했는데 1713년 2월 그곳 궁정의식에 참석하여 그의 첫 세속 칸타타인 〈사냥 칸타타 Was mir behagt〉(BWV 208)를 연주했다.




1713년 말 할레에 있는 리프프라우엔 교회의 프리드리히 빌헬름 차호의 자리를 이어받을 수 있는 기회가 생겼으나 헤르초크가 급료를 올려주자 바흐는 바이마르에 계속 머물렀다. 1714년 3월 2일 부지휘자가 되면서 매달 한 편의 칸타타를 작곡해야 하는 의무를 지게 되었다. 그의 양식이 심오한 변화를 겪었던 1708~14년 사이의 자세한 사실은 밝혀지지 않고 있다. 그러나 1714~16년에 작곡된 칸타타를 볼 때 분명 그는 당시의 이탈리아 오페라 양식과 형식, 그리고 안토니오 비발디를 비롯한 이탈리아의 협주곡 작곡가들의 영향을 받은 것이 확실하다. 그 결과 1714년에 작곡된 칸타타 182, 199번 및 61번, 1715년에 작곡된 31번과 161번, 그리고 1716년에 작곡된 70번과 147번이 나왔다. 이탈리아 양식에서 비롯된 기법인 어떤 곡의 전체를 그대로 또는 변형시켜 반복하는 리토르넬로 또는 다카포 기법을 즐겨 썼는데, 그는 이 기법들을 써서 그때까지 보다 규모가 큰 음악형식을 만들 수 있었다. 새로이 습득한 이러한 기법은 그의 아리아와 콘체르토, 보다 규모가 큰 푸가(특히 완숙기에 작곡된 오르간을 위한 푸가들)에 나타나고 있으며, 코랄 작법에도 영향을 주었다. 여러 작품 중 분명히 바이마르 시대에 작곡된 곡들은 〈오르간 소곡집 Orgelbuchlein〉에 있는 대부분의 작품과 소위 18곡의 '대(大)' 코랄 전주곡이라고 불리는 작품(그중 마지막 18번째 곡은 제외), 최초의 오르간 트리오, 오르간 전주곡과 푸가들이다. 오르간을 위한 '대(大)' 〈전주곡과 푸가 G장조〉(BWV 541)는 1715년경에 최종적으로 개작되었고, 〈토카타와 푸가 F장조〉(BWV 540)는 바이센펠스에서 연주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1716년 12월 1밀 바이마르의 궁정 악장인 요한 자무엘 드레제가 죽자 보잘것없는 실력의 소유자인 그 아들이 그 자리를 이어받았다. 이에 분개한 바흐는 쾨텐의 레오폴트 대공 측에서 제의한 궁정 악장 자리를 수락했고, 1717년 8월 그 취임이 확정되었다. 헤르초크 빌헬름은 바흐의 사임을 받아들이지 않았는데 그와 사이가 좋지 않은 조카와 바흐가 절친했던 것이 그 부분적인 이유였던 것으로 보인다. 9월경에는 프랑스의 유명한 오르간 연주자인 마르샹과 바흐와의 경연이 준비되었다. 당시의 정확한 상황은 알려지지 않았지만 경연이 있기 몇 시간 전에 마르샹은 드레스덴을 떠나버렸기 때문에 내용상으로 바흐가 이긴 것이었다. 이 일이 있은 후 용기를 얻은 바흐는 바이마르 궁정에 사임을 요청했고, 헤르초크는 얼마 동안 그를 감금하기까지 했지만(11. 6~12. 2) 결국 풀어주었고, 그는 할레에서 북쪽으로 50㎞ 떨어진 쾨텐으로 갔다.




쾨텐 시대

쾨텐의 궁정 악자으로서 주로 실내악과 관현악에 전념했다. 몇몇 작품들은 이전 것을 나중에 개작한 것이지만 바이올린과 클라비어, 비올라 다감바와 클라비어를 위한 소나타들과 무반주 바이올린과 첼로를 위한 작품들은 이 무렵에 작곡된 것이었다. 1721년 3월 24일 〈브란덴부르크 협주곡〉이 완성되었고, 그 중 6번은 비올라 다 감바를 연주하는 대공의 기교적인 한계를 염두에 두고 작곡된 것이다. 아울러 그는 대공의 생일과 그밖의 여러 행사를 위한 칸타타 몇 곡을 작곡했으나 지금은 보다 일반적인 가사로 바꾼 후기의 개정판만이 남아 있다.




바흐는 쾨텐에서 건반악기 교재 음악도 작곡했는데 W. E. 바흐를 위한 〈클라비어 소곡집 Clavierbuchlein〉(1720. 1. 22 시작), 〈프랑스 모음곡 French Suites〉의 일부, 〈인벤션 Inventions〉(1720), 〈평균율 클라비어 곡집〉 제1권(1722)이 있다.




1720년 7월 8일 마리아 바르바라 바흐가 갑자기 죽었다. 바흐는 이듬해 12월 3일 바이센펠스의 트럼펫 연주자의 딸인 안나 마크달레나 빌켄과 재혼했다. 첫번째 부인의 죽음을 제외한다면 쾨텐에서의 첫 4년 동안은 그의 일생에서 가장 행복했던 시절이었다. 대공은 진실로 음악을 이해했고 바흐는 그러한 대공과 최상의 관계를 유지했으며 또한 그 곳에서 일생을 마치기를 원했다. 그러나 1721년 12월 11일, 대공이 결혼을 하면서 상황은 변했다. 대공비는 남편이 자기에게만 관심을 가져 주기를 원했고 바흐는 소외감을 느끼기 시작했다. 또한 1710년과 1714년에 각각 태어난 두 아들의 교육문제를 생각해야 했기 때문에 요한 쿠나우의 죽음으로 음악감독 자리가 비게 된 라이프치히로 옮겨갈 생각을 했던 것 같다. 그러나 그가 그 자리에 들어가고자 했을 때는 이미 바흐의 친구인 게오르크 필리프 텔레만이 제안을 받았으나 거절했고, 다시 당대의 뛰어난 작곡가이며 다름슈타트의 음악감독이었던 크리스토프 그라우프너에게 제안된 상태였다. 그라우프너가 그 요청을 받아들일지 분명하지 않았기 때문에 바흐는 1723년 2월 7일 칸타타 22번 〈예수께서 12사도를 이끄셨도다 Jesu nahm zu sich die Zwolfe〉를 시연했다. 그러나 4월 9일 그라우프너가 초청을 정식으로 거절했을 때는 이미 라이프치히로 가기로 약속되어 있었으므로 4월 4일에 그와 대공 사이를 소원하게 만들었던 대공비가 죽었지만 그는 쾨텐을 떠나 5월 13일 라이프치히에 부임했다. 그 후 그는 쾨텐의 명예 궁정악장으로 임명되었으며, 그와 그의 부인은 1728년 11월 19일 대공이 죽을 때까지 때때로 그곳에서 일했다.




라이프치히 시대

라이프치히 시의 교회 음악감독으로서 바흐는 교회 연주자를 책임져야 했다. 페터 교회 성가대에서는 단지 찬송가를 인도했고 노이 교회, 니콜라이 교회, 토마스 교회에서는 성부 합창을 했지만 바흐 자신이 직접 지휘를 하고 자신이 작곡한 교회 음악을 연주한 곳은 니콜라이 교회와 토마스 교회 두곳뿐이었다. 그의 첫번째 공식 연주는 삼위일체 축일 다음의 첫번째 일요일인 1723년 5월 30일에 있었던 칸타타 75번 〈가난한 잔치에 초대받으리라 Die Elenden sollen essen〉의 연주였다. 1723년에 여러 곡의 칸타타와 마그니피카트를 포함한 신작들을 작곡했으며 1724년 전반에는 〈요한 수난곡 St. John Passion〉을 만들었다. 이 기간에는 무려 62여 곡이나 되는 칸타타가 연주되었는데 그 가운데 39여 곡은 신작이었다. 1724년 6월11일 삼위일체 축일 다음의 첫 주일에 바흐는 다시 칸타타를 작곡하기 시작했으며 그 기간 동안 52곡이나 되는 소위 코랄 칸타타를 작곡했다. 〈B단조 미사〉의 거룩송(상투스)은 크리스마스 때 연주되었다. 라이프치히에서의 첫 2년(혹은 3년) 동안 그는 엄청나게 많은 칸타타를 써 거의 1주에 한 곡씩 작곡한 셈이었다. 라이프치히에서의 첫 3년 동안 칸타타에 전념한 결과, 장차 축일과 축일예배에 필요한 교회음악 대부분을 쓰게 되었다. 그래서 1726년 이후로 관심을 다른 곳으로 돌려 1729년 〈마태 수난곡 St. Matthew Passion〉을 작곡했는데 이 작품은 1730년대 중반에 일기 시작한 칸타타보다 규모가 큰 성악작품에 대한 관심의 시발점이 된 작품이었다. 같은 경향의 작품으로는 〈마가 수난곡 St. Mark Passion〉(1731, 지금은 전하지 않음)․〈크리스마스 오라토리오 Christmas Oratorio〉(BWV 248, 1734)․〈승천축일 오라토리오 Ascension Oratorio〉(칸타타 11번, 〈그 나라에서 주님을 찬양하여라〉, 1735)가 있다.




음악외적 직무

교회 감독으로서 의무 외에 토마스 교회 부속학교의 음악감독으로서 여러 가지 음악외적인 직무를 수행해야 했는데 그는 이러한 음악외적인 직무를 달갑지 않게 생각했고, 오르간을 연주하거나 실험하는 일 또는 아들을 데리고 드레스덴 오페라를 관람하기 위해 그리고 그가 평생 지켜온 명예 궁정악장의 의무를 다하기 위해 자주 자리를 비웠다. 어느 정도는 보수가 충분하지 못해 돈이 필요했으므로 다른 일을 맡게 되었으며 이 때문에 바흐와 그의 고용주 사이의 불화는 거의 폭발 직전까지 이르렀다. 바흐가 처음에 기대했던 보수와 지위에 따르는 특권(특히 라이프치히 대학의 파울리너 교회에서의 음악 활동에 대한 의무에 관해서)은 시의회가 생각하는 것과 달랐으며, 대학 오르간 연주자인 고틀리프 괴르너와도 차이가 있었다. 다시 말해서 바흐는 고용주의 입장에서 본다면 텔레만과 그라우프너 다음으로 고려된 제3의 별로 내키지 않는 선택이었던 것이다. 더욱이 당국은 음악적인 소질이 없는 아이들을 학교에 받아들이도록 요구해서 뛰어난 가수를 양성해서 교회에 보내야 하는 바흐의 입장을 불편하게 했으며 또한 품위있는 관현악단을 운영하는 데 필요한 예산 지출조차 거절했다. 이러한 처사에 따른 불만은 1730년경에는 심각한 정도에 이르렀다. 이런 위기는 바이마르에서 바흐를 알게 되어 그를 존경했던 요한 마티아스 게스너가 교구 목사로 새로 부임하면서 일시적으로 가라앉았지만 그가 머물렀던 기간은 겨우 1734년까지였다. 게스너의 후임인 아우구스트 에르네스티는 교육에 관해 첨단적 사고를 지니고 있었으며 그에 따르면 음악은 인문과학의 한 분야가 아니라 시간을 낭비하는 부수적인 것에 불과했다. 1736년 7월 바흐가 학사장을 임명할 권한이 있는 지를 둘러싼 논쟁이 벌어지면서 다시 분쟁이 폭발, 결국 세인의 입에 오르내리게까지 되었다. 다행스럽게도 바흐는 1736년 11월 작센 선제후(選帝侯)의 궁정 작곡가가 되었으며 어느 정도 시간이 지체되긴 했지만 궁정의 친구들을 설득해 공식적인 심리를 하도록 했고, 1738년에는 에르네스티와의 논쟁도 진정되었다. 논쟁이 해결되게 된 내용은 밝혀지지 않았지만 그 이후로 그는 자신이 원하는 대로 할 수 있게 되었다.




작품

1726년 자신이 작곡한 전체 칸타타 가운데 〈파르티타〉에 관심을 기울였으며 1731년에는 작품집으로 출판했다. 이러한 배경에는 라이프치히 이외 지역에서 인정을 받아 보다 조건이 좋은 일자리를 확보하려는 의도가 있었던 듯하다. 1735년 〈클라비어 연습곡집 Clavierubung〉 제2부가 나왔는데 여기에는 〈이탈리아식 협주곡〉과 〈프랑스 서곡(파르티타) B단조〉가 포함되어 있다. 1739년에 출판된 제3부는 〈전주곡과 푸가 Eb 장조〉가 있는 〈오르간 미사〉로 이루어져 있다. 1729~36년에 걸쳐 바이센펠스의 명예 궁정악장으로 있었으며, 1729~37년, 1739년부터 1년 혹은 2년 동안 라이프치히 대학의 콜레기움 무지쿰을 지휘했다. 그때의 연주회들을 위해 이전에 작곡한 협주곡들을 하프시코드 협주곡으로 개작함으로써 실내악에서 하프시코드의 오른손 부분을 진정한 선율부로 사용했고, 건반악기와 관현악을 위한 협주곡을 작곡한 최초는 아닐지라도 첫번째 작곡가 중 한 사람이 되었다. 이러한 사실은 보수적이고 전통적인 작곡가로만 인식되었던 그의 개혁자로서의 면모를 보여주는 여러 가지 예 중의 한 가지에 불과하다. 1733년경 궁정에 일자리를 얻으려는 의도로 작센 선제후와 그 가족을 기리는 칸타타를 작곡하기 시작했는데 결국 1736년에는 그 뜻을 이루었다. 이들 세속 칸타타의 상당수는 종교적 가사를 붙여 개작되었으며, 〈크리스마스 오라토리오〉에 다시 사용되기도 했다. 1733년에 작곡된 〈B단조 미사〉의 연민송(Kyrie)과 영광송(Gloria)은 역시 선제후에게 헌정되었지만 그 나머지 부분은 그의 말년에 이르러서야 완성되었다. 드레스덴을 방문했을 때 러시아 공사인 그라프 헤르만 카를 폰 카이저링크의 인정을 받았는데 공사는 그에게 〈골트베르크 변주곡 Goldberg Variations〉을 위촉했다. 이 변주곡집은 1742년경 〈클라비어 연습곡집〉의 제4부로 출판되었으며, 〈평균울 클라비어 곡집〉의 제2권도 같은 무렵에 완성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와 더불어 바이마르 시절의 오르간 작품들을 개작한 칸타타 몇 곡을 만들었으며, 1746년경에는 〈쉬플러 코랄 전주곡 Schubler Chorale Preludes〉을 출판했다.




말년

1747년 5월 포츠담에 있는 아들 에마누엘을 방문해서 프로이센의 대왕 프리드리히 2세 앞에서 연주를 했으며, 7월에 왕이 준 주제에 대한 즉흥연주를 〈음악의 헌정 The Musical Offering〉으로 완성했다. 1747년 6월에는 전에 그의 제자였던 로렌츠 크리스토프 미츨러가 설립한 음악학회에 가입했으며 그 학회에 그는 코랄 〈높은 하늘에서 땅으로 내려오는도다 Vom Himmel hoch da komm'ich her〉를 주제로 한 카논 변주곡을 헌정했다. 바흐의 말년의 병에 대해서는 그 병이 여러 달 계속되었다는 것과 그로 인해 〈푸가의 기법〉을 완성하지 못했다는 사실 외에는 거의 알려져 있지 않다. 시력을 잃은 두 눈을 수술한 것이 실패하여 건강이 더욱 악화되었으며, 결국 1750년 6월 28일 라이프치히에서 숨을 거두었다. 그의 아내 안나 마크달레나는 의붓아들들이 전혀 돌보지 않았으며 친아들은 너무 어렸기 때문에 홀로 남아 극심한 궁핍을 겪었다. 그녀는 1760년 2월 27일에 죽었는데 장례식은 빈민구제를 위한 조치로 치러졌다. 미완성인 채로 1751년에 출판된 〈푸가의 기법〉은 거의 주목을 끌지 못했으며, 1752년에는 유명한 베를린의 음악가이며 후일 왕실 복권 감독 프리드리히 빌헬름 마르푸르크의 찬사와 함부르크의 영향력있는 작곡가이자 비평가인 요한 마테존의 인정에도 불구하고 1756년경에는 단지 30부 정도의 악보가 판매되었으며, 알려진 바로는 그 악보는 폐품으로 팔렸다고 한다.




에마누엘 바흐와 오르간 연주자이자 작곡가인 요한 프리드리히 아그리콜라(제바스티안의 제자)가 바흐를 위해 사망기사를 쓰고 미츨러가 몇 마디 끝맺는 말을 덧붙여 음악학회의 학회지(1754)에 실어 출판했는데 이 글의 영역본은 〈The Bach Reader〉에 수록되어 있다. 불완전하고 부정확한 점이 없지 않지만 이 글은 바흐에 대한 1차 자료로서 중요성을 가지고 있다.




그는 좋은 남편이자 훌륭한 아버지였다. 그리고 20여 명의 자녀를 두었으나 그중 10명의 아이들은 어린 나이로 죽었다. 그는 검소하고 겸손하고 친절했다. 음악이 신사에게 적당한 직업이 아니라고 생각되기 시작한 시대를 살았던 그는 때로 인간으로서 또는 음악가로서의 권리를 주장해야 했고, 이점에서는 결코 타협하지 않았지만 어떤 냉정한 고용주와도 마찰을 일으키지 않았으며. 동료 음악가들과도 침밀한 관계를 유지했다. 아울러 그는 훌륭한 선생이었으며 뮐하우젠 시대 이후 결코 제자가 끊인 적이 없었다.




명성과 영향

바흐가 죽고 50여 년 동안 그의 음악은 빛을 보지 못했다. 하이든과 모차르트 시대에 이미 생전에도 진부한 작곡가로 생각되던 바흐는 관심의 대상이 아니었으며, 특히 전체 작품의 절반 가량이 교회 칸타타인 그의 작품으로는 이미 종교적 사상이 변화를 겪은 상황에서 주목을 끌 수 없었음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현대의 저술가가 말하는 것처럼 18세기 후기의 음악가들은 바흐의 음악을 몰랐던 것도, 그 영향에 대해 둔감하지도 않았다. 에마누엘 바흐가 그의 아버지에게서 받은 영향도 대단한 것이지만 바흐의 영향은 하이든․모차르트․베토벤에게도 직접 미쳤다.




바흐 음악의 부활

1800년 이후 바흐 음악은 재생의 전기를 맞았다. 독일의 저술가 요한 니콜라우스 포르켈은 〈바흐의 생애․예술․작품에 대하여 Uber Johann Sebastian Bachs Leben, Kunst und Kunstwerke〉(1802)를 출판했으며, 1801년부터 바흐의 작품을 모아 출판하기 시작했던 출판업자 호프마이스터와 퀴넬의 조언자로 활동했다. 그 작품집은 나폴레옹의 출현으로 절판되었지만 1829년경에는 대표적인 건반음악 선집과 극소수이기는 하지만 성악곡도 출판되었다. 그해에 독일의 음악가 에두아르트 데프리엔트오 독일의 작곡가 펠릭스 멘델스존이 〈마태 수난곡〉 100주년 음악회를 가짐으로써 한 걸음 더 나아가게 되었다. 이 작품과 〈요한 수난곡〉은 1830년에 출판되었고 〈B단조 미사〉도 곧이어 출판되었다(1832~45). 라이프치히의 출판업자 페터스는 1837년에 피아노곡과 기악곡을 모아 출판하기 시작했고, 1844~52년에는 오르간 곡들을 출판했다. 로베르트 슈만의 격려로 바흐서거 100주년이 되는 해인 1850년에 바흐 전집 출판을 목적으로 하는 바흐 협회(Bach-Gesellschaft)가 발족되었다. 1900년경에는 바흐의 알려진 전작품이 출판되었고, 신바흐 협회(Neue Bach-Gesellschaft)가 바흐 협회를 계승했다. 신바흐 협회는 지금도 음악제를 기획하고 바흐의 널리 알려진 작품들을 출판하는 등의 사업을 하고 있으며, 학술지 〈바흐 연보 Bach Jahrbuch〉(1904~)를 발간하고 있다. 1950년경에는 '바흐 협회판'의 결함이 분명하게 드러남에 따라 괴팅겐과 라이프치히에 본부를 둔 바흐 연구소가 설립되어 전 84권으로 예정된 새로운 표준판(NBA) 제작을 시도하고 있다. 바흐에 관한 전기나 비평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으로는 독일의 음악학자 필리프 슈피타의 기념비적 연구서인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전 2권, 라이프치히, 1873~80)를 꼽을 수 있는데 이 책은 바흐의 생애와 작품뿐만 아니라 역사적 배경까지도 잘 다루고 있다. 비록 세부적인 면에서 오류가 있기는 하지만 아직도 이 책은 바흐 연구에 있어 필독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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