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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atie, Erik (사티)

출생국가

  프랑스

활동년도

  1866-1925

활동년도

  238 곡

활동년도

  66

        
 

1866년 아버지 옹플뢰르의 해운 업자,어머니 스코트랜드인 사이에서 태어났다. 어릴 때 출생지에서 성당 오르가니스트인 비노(Vino)에게 피아노와 그레고리오 성가 및 신비사상을 계몽받고, 남다릉 성격에 숙부에게 성격적 감화를 받았다. 모친의 사후(1878)부친과 파리로 이주(부친은 피아노교수와 재혼), 그해 파리국립음악원입학, 화성과 피아노를 배웠으나, 아카데믹한 음악에 반감을 가지고 독서에 몰두, 특히 안데르센의 동화를 애독하였으나, 오래지 않아 다시 방향을 바꿔 고딕건축․그레고리오 성가를 연구하고 피아노곡집 《첨궁형-Ogives》을 출판하였다. 포방대에 입대, 고의로 기관지염에 걸려 제대한 뒤 그해, 피아노 선법적(旋法的)인 《3곡의 짐노페디-Les trios Gymnopedies》 《사라반드》, 또 1890년 조표와 마딧줄을 폐지한 《3곡의 그노시엔느-Les trios Gnossienne》를 작곡하여, 그 작풍으로써 드뷔시와 라벨에 큰 영향을 주었다. 몽마르트르의 카페에서 피아노를 치며 생계를 세우는 한편, ‘장미십자종단(薔微十字宗團,rosecroix)’에 관심을 가지고 입단, 종단을 위한 음악 《별의 아들-Le Fils des Etoiles》(1891) 등을 작곡하였다. 얼마 뒤 자신의 가공적 종단 ‘지도자 예수의 예술수도회(Eglise Metropolitane d'Art de Jesus Conducteur)’를 설립하고 기관지를 발행하여 비평가 고티에 빌라르(Gauthier Vilars)등, 마음에 들지 않는 자를 맹렬히 공격하였다.




또,《영웅적인 천국의 문의 전주곡-Prelude de la porte heroique de ciel》(1894), 《가난한 자들을 위한 미사-Messe des pauvres》(1895) 등을 작곡했다. 무명이몄음에도 불구하고 학사언 화원에 3회 입후보했는데 몯 거부당했다. 1891년 드뷔시와 만나 친교가 시작되었고,오페라 좌에 발레《Uspud》를 제출하였으나 공연되지 않았다.1897년 피아노를 위한 《서늘한 소곡집-Pieces froides》을 작곡, 작풍이 투철한 신경지에 들어섰다. 이듬해 1898년 몽마르트르에서 파리 남쪽 교외의 빈민지구인 아르퀴유카샹(Arcueil-Cachan)에 주거를 옮기고, 평생 동안 독신으로 그곳에 머무르면서 그곳 급진사회당 위원회에 가맹, 동회일, 특히 아동복지를 위해 헌신적으로 활동하면서 샹송을 지었다. 1903년 드뷔시의 ‘좀더 형식을 생각해야 된다’ 는 충고를 받아들여 피아노 연탄용(聯彈用),《배를 위한 3개의 곡-Trios morceaux en 래귿 de poire》을 써서 또다시 새로운 경지를 보였다.




1905년 39살로 기술의 연마를 뜻하고 뱅상 댕디(D'Indy)가 주재하는 스콜라 칸토룸에 학생으로 입학하여 대위법과 이론을 연구, 1908년 우등으로 졸업하였다. 1911년 라벨의 주선으로 ‘독립음악협회(Scociete Music Independant)’에서 ‘사티의 밤’을 개최하였다. 이무렵부터 명성이 올라 초기부터의 작품을 공연하게 되었고 ‘사티주의자’ 도 늘어났다. 《엉성한 진짜 전주곡(개를 위하여)-Veritable prelude flasques (pour un chien)》 《말의 옷차림으로-En habit de cheval》 《바싹 마른 태아-Embryons desseches》《관료적인 세레나데-Sonatine bureaucratique》《옛시절과 순간-Heures seculaires et instanees》등 기묘한 주제와주석을 붙인, 그러나 순음악적이면서 정묘한 피아노 곡을 발표하였고, 또 수필 『건망(健忘)회고록-Memoires d'un amnesique』을 저술하였다. 1914년 제 1차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사티는 하사로 종군, 아르퀴유 지구의 퍼트롤에 복무하였다. 1915년에 장 콕토를 알게되어, 그의 대본으로 이듬해 디아길레프 무용단(舞踊團)을 위하여 사이렌․타이프라이터․비행기 소리․피스톨다이나모 등을 오케스트라 중에 사용한 발레를 작곡, 피카소의 무대장치와 마신의 의상 및 안무에 의하여 1917년에 샤틀레(Theatre Chatelet)에서 초연하여 ‘큐비즘 발레’ 라는 hans이 자자했다.




이 무렵 낭만주의․게르마니즘을 배격하고 간명한 객관주의 미학을 주창, 사티를 그 선도자로 내세워 찬미하면서 미요․풀랑크․오네게르․오릭 등 ‘6인조’를 세상에 소개한 콕토의 논문 「수탉과 아를르캥-Le Coq et l'arlequin」이 나와 사티는 비외 콜롱비에(Vieux-Colombier)좌(座)의 연주회 기획 주재가 되어 ‘6인조’의 작품을 비호, 소개하였다. 1918년 폴리냑겅작부인(la princesse de Polignac)의 위촉을 받고, 빅토르 쿠쟁(Victor cousin)이 프랑스어로 번역한 플라톤의 『대화편』중 3장에 의한 4인의 소프라노와 관현악을 위한 교향적 극작품 《소크라테스-Socrate, drame symphonique en trio parties avec voix》를 작곡(1920 파리초연)하여, 간소하면서 위대한 표현에 도달하고, 또 후년에 대두된 신고전주의의 선구자가 되었다.




1919년 피아노를 위한 《5개의 녹턴-Cinq Nocturnes》을 작곡한 뒤,‘사람의 주목을 끌지 않고 가구처럼 그저 거기에 있는 음악’으로서 ‘가구의 음악(musique d'ameublement)’을 주창하고 또 《영화를 위한 막간-Entracte cinematographique》,트리스탄 차라(Tristan Tzara)의 다다이즘극《메두사의 함정-Le Piere de Meduse》을 위한 음악과 쉬르레알리즘 발레《휴식-Relache》,피카소 및 마신과 협력하여 지은 발레 《메르쿠리우스-Mercure》를 발표하여 계속적으로 세상에 충격을 주었으나, 1924년 벨기에 순화강연을 마친 뒤로 병을 얻어 활동을 못하고 성 조제프 병원에서 별세하였다.




akssusd 로제 데조르미에르(Roger Desormiere), 앙리 소게(Henri Sauguet), 막심 자콥(Maxime Jacob)등, 사티를 숭배하는 젊은이들이 그의 주위에 모였는데, 이것을 ‘아르쾨유 악파(Ecole d'Arcueil)’라고 한다.그 반골정신과 기괴성 때문에 사티는 자주 오해를 받았으나, 실은 일체의 허식을 떨어버린, 지극히 밀도 높이고 객관적이며 투명한 음악을 작곡하여, 그 뒤의 드뷔시․라벨에게 큰 영향을 준 동시에, 6인조 이래의 근대 프랑스음악의 원천이 되어 중기의 스트라비스키의 ‘신고전주의’의 선구자가 되었다. 또 20세기 프랑스음악을 중심으로 하는 ‘선법의식의 부흥’도 그에게 힘입은 바가 컸다. 지극히 순수한 음악정신의 소유자이며 근대․현대음악이 예언자적 존재였지만 그 의의는 오늘날에도 충분히 평가되어 있다고 하기는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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